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민국 북양정부 (문단 편집) == 역사 ==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직을 받고 북양정부 수립을 완료한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베이징]]에 두었으며, [[독재]] 체제를 굳히려는 양상을 보였다. 그는 안으로는 혁명가들을 탄압하였으며, 밖으로는 열강들에게 너무 많은 이권을 주어 점차 국민들의 반발을 산다. 대총통에 집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문들과 장남 위안커딩의 권유로 이전부터 꿈꿔왔던 황제의 꿈을 실현시켰다. 중화민국을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심지어 측근들도 대부분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가족들조차 위안커딩을 제외하면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더 나아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들 반발에도 직면하였다. 결국 1915년 12월 25일에는 [[운남군벌]]의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합세하여 토원 봉기가 일어나는 등 봉기가 전국으로 퍼져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3월 23일 제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측근들의 배신과 하야 압력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6월 6일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은 임시약법과 구국회의 회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헌법 제정 문제로 국회 내부의 정쟁이 이어졌고 [[부원지쟁]]과 [[장훈복벽]]을 거쳐 중화민국 국회가 다시 전복되면서 [[호법전쟁]] 등 남북 내전이 이어졌다. 북방에서는 북양정부의 권력을 쥐기 위해 북양군벌에서 갈라진 계파인 [[직예군벌]], [[안휘군벌]], [[봉천군벌]] 등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며 중앙에서 대립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는 지역 [[군벌]]들이 난립하여 내전을 이어갔고,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1928년까지 이어졌다. 1919년 [[외몽골 출병]]을 통해 외몽골을 다시 복속시키는 등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세력에게 장악되어 다시 상실하고 만다. 1926년 [[장제스]]의 [[국민혁명|북벌]]이 시작되면서 북양정부를 치기 위해 북상했고, 이에 북양군벌들의 계파는 급하게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대응했다. 국민당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곧 [[영한합작]]을 통해 난징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로 통합하였고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등과 힘을 합쳐 2차 북벌에 나섰다. 결국 장쭤린은 수도를 봉천으로 옮긴다고 선포한 후 내각을 거느리고 본거지인 만주로 퇴각하다가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등이 일으킨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어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지도자가 되지만, 국민당과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 결국 [[장제스]]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중화민국/역사, version=10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